'경술국치' 소재 소설 붐

'불멸' '이완용을 쏴라' '좌옹의 길' '제국익문사'…

기록엔 없는 역사의 이면 실존적 고뇌·좌절에 초점

'중근이 목숨까지 돌아보지 않고 다가가려 했던 것은 한 송이 꽃이 아니라 그것으로 표상된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지고한 가치를 향한 자기 투척의 용의였으며, 죽음조차 잊게 하는 아름다움에의 탐닉과 몰입이었다.'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을 맞아 지난 2월 출간된 이문열 장편소설 '불멸'(민음사)에 소개된 안 의사의 소년 시절 일화다. 작가는 꽃의 아름다움을 얻기 위해 벼랑가에 갔다가 죽을 고비를 넘겼던 경험을 통해 훗날 안 의사의 내면에 형성되는 강렬한 자기봉헌 의식을 암시했다. 안 의사의 생애를 다룬 기왕의 전기들이 그의 동양평화사상이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처단의 당위성에 초점을 맞춘 것과는 다른 시각의 접근이었다.

일본의 조선 강제병합을 전후한 역사를 다룬 소설들이 경술국치(庚戌國恥) 100년을 맞아 잇달아 출간되고 있다. 이 소설들은 공식 기록과 연구논문에 담기지 않은 이면의 역사에 대해 서사적 이해를 시도한다. 특히 민족적 가치에 대한 당위론적 강조보다 격동의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이 겪어야 했을 내면의 실존적 고뇌에 초점을 맞춘다.

이문열씨의 '불멸'에 이어 소설가 조성기씨가 친일 인명사전에 이름이 오른 윤치호(1865~1945)의 일대기를 다룬 장편 '좌옹의 길'(웅진문학에디션 뿔)을 최근 발표했고, 소설가 강동수씨는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우범선(1857~1903)이 등장하는 '제국익문사'(실천문학사)를 냈다. 김상현씨는 매국노 이완용(1858~1926)을 암살하려는 자와 그를 살려두려는 자들 사이의 갈등을 그린 '이완용을 쏴라'(우원북스)를 출간했다.

'좌옹의 길'은 조국 근대화를 위해 일본을 이용하겠다는 생각이 현실적으로는 친일(親日)로 규정될 수밖에 없는 시대적 상황 아래 고뇌하는 윤치호의 내면에 초점을 맞춘다. 3·1독립선언서 인쇄 현장에 나타났다 사라진 종로경찰서 형사 신승희는 이를 눈감아주는 조건으로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를 받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자신을 감시하던 형사의 자살 소식을 들은 윤치호는 친일파로 낙인찍힌 자신도 언젠가 같은 운명을 겪을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소설은 '신승희를 위한 눈물인지 자신을 위한 눈물인지 두 줄기 눈물'(254쪽)을 흘리는 장면을 통해 그가 겪었을 고뇌를 주목한다.

'이완용을 쏴라'도 민족반역자 이완용을 처단하려는 당위적 가치에 집중하기보다 노모(老母)의 약값을 마련하기 위해 이완용의 경호를 맡은 청년과 이완용을 처단하려는 세력 사이의 갈등을 식민지의 고단한 현실풍경과 겹쳐서 그려냈다. '제국익문사' 역시 명성황후 시해라는 국가범죄적 행위에 대한 분노에서 한발 물러난다. 국모 시해에 가담했다가 1903년 살해당한 우범선이 소설에서는 목숨을 건져 피신했다고 가정한다. 공화주의자인 우범선은 고종황제의 정보기관인 제국익문사 수장이 된 친구 장동화와 맞선다. 장동화는 옛 친구를 쏘며 절규한다. "자네의 길은 옳은 길이 아니었어(…) 그렇다면 내가 가는 길이 과연 조선의 국체를 보존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할 테지. 그건 나도 모르겠네."(2권 280쪽)

소설가 조성기씨는 "일제시대를 살아보지 못한 우리 세대가 그 시대의 미묘한 굴곡과 숨결들을 제대로 파악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며 "문학의 임무는 누가 친일파냐 아니냐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친일파로 지목을 받고 있다 하더라도 그 내면의 생각과 고민, 소망과 좌절이 어떠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태훈 기자 scoop87@chosun.com]